“올 한해 만난 시민들이 평생 동안 만나온 시민의 수보다 많다”고 말하는 고창록 씨. 아파트 입주자대표로 마을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을상담원으로 일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마을살이의 즐거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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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하면 삭막한 느낌이 먼저 떠오른다. 시멘트로 된 벽과 아스팔트가 깔린 바닥, 그리고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차 등에서 푸릇한 자연이나 이웃의 따뜻한 정이 먼저 떠오르긴 힘들다. 노원구 하계동 한신아파트의 첫인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신아파트에는 비밀의 공간이 있다. 아파트 옥상 위에 꾸며진 옥상텃밭 ‘한신에코팜’이 그것이다.
“아파트 입주자대표가 되면서 주민과 주민을 이어줄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촌 현실이나 농업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함께 농사를 지으면 주민들 사이에 더 많은 소통과 화합이 이뤄지지 않을까 기대했지요.”
고창록(64세) 씨가 농사를 떠올린 건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이 갖는 본질적인 삭막함 때문이었다. 1,200세대나 함께 살고 있지만 이웃간의 정은커녕 서로 무관심하기만 했다. 주민들과 함께하자고 회의를 개최해도 나오는 이는 열 명 안팎에 불과했다. 과연 아파트에서도 살 맛 나는 마을을 만들 수 있을까. “전원주택에 왜 관심을 갖겠습니까. 도시에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꿈을 언제나 갖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작물을 기르면 온정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때마침 옥상 정비를 하면서 풍부한 햇빛과 바람이 공존하는 옥상을 ‘재발견’하고 텃밭을 꾸미게 되었다고.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았다.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부터 옥상텃밭을 만들기 위한 기반 공사, 효율적인 운영 방법, 옥상을 오르내리면서 생기는 소음, 농약과 비료 때문에 발생할 공해 등에 대한 민원까지. 아파트에 하중을 주지 않기 위해 일반 흙보다 가벼운 흙을 개발해 2010년 비닐하우스로 실험 재배를 할 정도로 고창록 씨의 열의는 뜨거웠다.
“우리 아파트는 라인댄스를 추거나 영어를 배우거나 하는 문화 커뮤니티가 다른 아파트보다 먼저 시작되어 활성화되어 있어요. 그래서 옥상텃밭도 그런 문화활동의 일환이라 홍보했지요. 또 옥상은 공공 공간이니 누구나 활용할 수 있고, 예상되는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게시물도 붙였고요.”
그러나 민원은 많았다. 농사를 짓는데 왜 공용 수도를 사용하느냐며 고소하겠다는 전화까지 걸려왔다. 설상가상으로 작물이 잘 자라지 않을 거라는 실망스런 예측도 있었다. “농촌진흥청에서 와서는 옥상에 내리쬐는 햇빛이 너무 세서 열매는 잘 안 맺힐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지금 옥상은 밀림처럼 무성해요. 수확물도 좋고요.”
농사가 잘되자 민원도 현저하게 줄었고 이젠 ‘옥상텃밭 반대파’들조차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고씨는 “이제는 사람들더러 옥상에 그만 좀 올라오라”고 구박을 해야 할 정도로 다들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한신에코팜은 개별경작구역과 공동경작구역으로 구분해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동경작구역에서 나온 작물은 텃밭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주민들에게도 나눠준다. 참여 회원만 수확물을 가져가면 다른 주민들과 소통이 아니라 불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단지 도시농업을 하기 위해서만 시작한 옥상텃밭이 아닌 만큼, 주민들의 화합과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 씀씀이가 읽히는 대목이다. 올해는 공동경작구역에서 수확한 수박과 참외를 가지고 두세 차례 파티도 했다. 노원구청장과 박원순 서울시장도 이곳에 와서 수박맛을 봤다고.
최근에는 협동조합 설립을 고민하고 있다. 이미 회원들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에 관한 기초교육도 받았다. “지금은 (서울시의) 지원을 통해 한신에코팜이 운영되고 있지만 지원을 계속 받을 거라는 보장은 없죠. 자립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파트는 서민아파트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여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그걸 이겨낼 수 있는 건 사람의 가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람과 사람의 연대와 관계 회복이 열쇠입니다. 그게 협동조합이 아닐까요?”
‘아파트를 마을답게’라는 고민에서 출발한 소박했던 활동이 이만큼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고씨는 1년 전부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더 많은 이들이 마을살이를 하도록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바로 ‘마을상담원’이다. 마을상담원이란 마을공동체 활동을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 선배로서 경험한 선례와 노하우를 알려주고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이들을 부르는 말이다.
“서울시가 지원하는 마을 사업이 시민들에게 실제로 유익하고 정말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경험해본 사람들의 도움이 중요하죠.”
올 한해 그는 금천구, 성북구, 강서구, 성남시 등을 누비며 마을 공동체 현황과 실태는 어떠한지, 어떤 의제를 가지고 마을활동에 임해야 하는지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가지고 강의를 하고 상담을 하며 바쁘게 보냈다. 그가 마을상담원으로 상담에 임하며 늘 염두에 두는 건, 언제나 ‘초심’이다.
“마을 상담을 하다 보면 당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사업계획서나 제안서 작성에 대해 질문이 집중됩니다. 하지만 그런 걸 일러주는 게 마을상담의 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을공동체 회복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분들이 마음을 열고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유도하는 일이 제가 해야 할 일이죠.”
마을 프로젝트의 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간혹 아쉬운 점도 보인다고 한다. 고씨는 서울시의 지원 사업 대부분이 공모방식이라 탈락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사업마다 의미가 있고, 참여자마다 의지가 있으니 선정에서 탈락된 지원자들을 발굴해서 인큐베이팅을 하면 좋지 않을까요? 1년 동안 마을상담원으로 활동해 보니 그분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더군요.”
“평생을 해왔던 영어강사라는 직업보다 마을상담원 활동이 더 의미 있다”는 고씨는 앞으로도 시민의 입장에서 마을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서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서울 시민들 중에 마을 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무관심한 이들이 더 많을 겁니다. 먹고 살기만 해도 바쁘니까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마을 살리기에 나설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시민운동을 하거나 풀뿌리 운동도 해본 적 없는 저 같은 일반인이야말로 일반시민들의 입장을 알고 있으니 그런 일은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웃음)”
욕심이 있다면 이제까지 해온 1년 동안의 활동과 관련해 책을 펴내는 것이다. 마을과 관련된 책은 많지만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을 제대로 소개하고, 특히 사례를 정밀하게 다룬 책은 없지 않느냐는 것. “그간 마을공동체 사업의 성공사례만 우르르 퍼나른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합니다. 그 안에 담긴 문제점을 짚어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도 담아내야죠. 그래야 마을이 진짜로 살아나겠죠.”
글과 사진_임은선 기자(소소북스),
사진 제공_고창록(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마을상담원)